드라마는 이야기와 인물뿐 아니라, 특정 문화가 익숙하게 반복하는 장치와 전형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이를 ‘클리셰’라고 부른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빗속 고백, 시한부 사랑, 삼각관계 같은 장면이 흔하고, 미국 드라마에서는 총격과 법정 배틀, 일본 드라마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상 에피소드, 유럽 드라마에서는 철학적 독백과 사회 비판이 전형처럼 반복된다. 클리셰는 진부해 보이지만, 사실은 각 문화권이 가장 쉽게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장치이자, 그 사회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코드다. 이 글은 한국과 해외 드라마를 비교하며, 클리셰가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 살펴본다.
한국 드라마: 감정의 과잉과 관계의 클리셰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는 감정의 과잉과 관계의 전환에 집중된다. 대표적으로 빗속 고백, 기억상실, 시한부 사랑, 삼각관계, 동거 설정이 있다. 이런 장치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감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겨울연가의 기억상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시한부 사랑, 도깨비의 비 내리는 장면은 모두 시청자의 감정 몰입을 극대화한다.
한국 사회는 집단적 정서와 관계망을 중시해 왔기 때문에, 드라마 역시 개인보다 관계의 역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는 두 사람 이상의 관계, 가족·연인·삼각관계 등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미국 드라마: 액션과 시스템의 클리셰
미국 드라마는 장르에 따라 뚜렷한 클리셰를 가지고 있다. 범죄·수사물에서는 천재 형사와 둔한 파트너, 사건 직후 등장하는 FBI 요원, 마지막 순간의 총격전이 거의 공식처럼 쓰인다. CSI, NCIS, 크리미널 마인드 같은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법정 드라마에서는 극적인 증언의 반전, 결정적 증거가 마지막에 등장, 열정적 변호사의 명연설이 필수 클리셰다. 이는 미국 사회가 개인의 권리, 법의 절차, 자유의 수호를 중시하는 문화를 반영한다.
또한 슈퍼히어로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세상을 구하는 단 한 명”이라는 개인 영웅 서사가 반복된다. 이는 개인주의 문화와 연결된다.
일본 드라마: 일상성과 인간관계의 클리셰
일본 드라마는 거대한 사건보다 일상의 디테일을 강조한다. 직장 상사와 부하의 갈등, 학교에서의 왕따와 우정, 하루하루 쌓이는 성장 같은 주제가 반복된다. 한자와 나오키에서는 정의로운 은행원이 부조리를 통쾌하게 응징하는 구도가 반복되며, 고독한 미식가에서는 주인공이 혼자 식사를 하며 내면을 독백하는 장면이 거의 모든 화마다 등장한다.
일본 드라마의 클리셰는 “작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큰 사건보다는 인간의 성실함, 노력, 관계의 균열과 화해가 서사를 이끈다. 이는 일본 사회가 안정과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와 맞닿아 있다.
유럽 드라마: 사회 비판과 철학적 대사의 클리셰
유럽 드라마, 특히 영국·북유럽 드라마는 사회 비판과 철학적 대사가 자주 반복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셜록은 단순 추리물이 아니라 사회 계급과 인간 욕망을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북유럽 느와르 드라마들은 우울한 색감, 비 내리는 도시, 삶과 죽음을 논하는 독백 같은 클리셰를 반복한다. 이는 개인의 내면보다 사회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둔다.
유럽 드라마에서 흔한 장면은 경찰이 범죄 현장을 바라보며 철학적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다. “우리가 잡는 것은 범죄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 속의 어둠일지도 모른다” 같은 대사는 클리셰처럼 반복되지만, 시청자는 그 무거운 울림에 매료된다.
문화별 차이의 원인
각국의 클리셰는 사회적 가치와 미디어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한국은 집단 정서와 감정 과잉이, 미국은 개인주의와 제도 중심 사고가, 일본은 일상의 디테일과 공동체 조화가, 유럽은 사회 비판과 철학적 성찰이 클리셰의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제작 환경도 영향을 준다. 한국은 16부작 미니시리즈 체제가 많아 빠른 감정 몰입이 필요하고, 미국은 시즌제·에피소드제 덕분에 장기적으로 캐릭터 아크를 그릴 수 있다. 일본은 한 화에 짧은 러닝타임으로 일상을 포착하고, 유럽은 시청자가 차분히 생각할 여백을 준다.
글로벌 시대, 클리셰의 변주 가능성
글로벌 OTT 시대에 드라마는 국경을 넘어 소비된다. 따라서 클리셰 역시 섞이고 변주된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식 서바이벌과 미국식 액션, 일본식 게임 장치를 융합했고, 더 글로리는 한국의 학교폭력 소재를 보편적 정의 추구 서사로 확장했다. 종이의 집: 코리아는 스페인 원작의 클리셰를 한국적 맥락으로 다시 재편했다.
앞으로 드라마는 여전히 각국의 클리셰를 유지하되, 다른 나라의 장치를 흡수하거나 뒤틀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낼 것이다. 익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주는 변주야말로 글로벌 시대 드라마의 경쟁력이 된다.